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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봉희목사
설교일 2023-5-10수
본문말씀 룻기 4:11-22

[17] 룻과 보아스

룻기 4:11-22    2023-5-10

 

지난주 기도 / 철통같이 굳게 닫힌 여리고 성에도 라합의 집에 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 이제도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로 가득하도록 닫힌 심령의 문들이 열리게 하소서. 큰 구원을 위해서 어떠한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믿음을 주옵소서.

 

작은 책 룻기는 사울왕 이전의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가정의 인생사를 생생하고도 극적인 형식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 룻, 그리고 보아스다. 참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한 가정이 현실적인 고통을 믿음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약속을 품고 있는 현실에서 육신의 삶으로 도피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 결국 이방 땅에서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인간은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슬픔 중에 그가 다시금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떠날 때의 믿음은 아직 (가진 자)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의 믿음은 ‘(가난한 자)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준비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룻이 모압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천대받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총회에서 쫒겨난 모압족속, 그 모압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문제였다. 차라리 자식도 없겠다 자기 족속인 모압에서 새로 시집가서 자식 낳고 살 수 있는 길이 더욱 용이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동서는 모압에 남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단호했다. 시어머니와 룻의 대화를 보라.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함께 지고 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나오미의 가족이 모압 땅에서 그나마 잃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하여도 이것만큼은 잃을 수 없었다.


인도를 영국이 점령하고 있을 때, 인도의 간디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은 모두 인도에서 물러가라. 그러나 그리스도만은 인도에 두고 가라

 

보아스 그리고 그리스도!

 

보아스는 룻의 죽은 남편 곧 시댁쪽으로 친족이었다. 그래서 유대법을 따라서 시형제와 친족이 죽은 남편을 대신하여 남편이 되어 자식을 낳아 죽은 남편의 자식으로 자식을 낳는 이른 바 기업을 무르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인자한 사람)이었다.

3: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룻이 자기 침소에 예고도 없이 들어왔을 때,

자상하면서도 침착하게 그 일을 다스릴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3:9)”라고 했을 때, 보아스 그는 감정을 따르지 아니하고, 의를 따랐다(3:12-13). 보아스 그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아스 그는 얼마든지 자기의 결혼대상자를 당당한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귀하게 여기고, 이방 여인인데다 죽은 남편의 기업을 잇는 자식을 낳게 된다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다(4:4-6).

 

축복이 있으라!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들 부부에게 축복하였다(4:11-12). 룻에게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레아와 라헬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축복했고, 보아스에게는 유력하고 유명하게 되기를 축복했고, 나오미에게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고 위로의 축복을 했고, 그 집안에 대해서는 유다의 장자부로서 남편을 잃은 다말이 유다에게서 난 베레스의 집과 같기를 축복했다.

 

보아스의 이름은 성전에 가는 사람마다 기억되게 하셨다.

왕상 7:21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야긴 그가 세우셨다” *보아스 유력자”, “그 안에 능력이 있다

 

보아스의 계보에서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라.


예수께서는 무고히 죄인이 되어 죽음으로 죄인들의 죄값을 치루셨다. 보아스는 자신이 가문의 종족을 이어가는 가장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도리어 룻에게 전남편의 성을 따라 아들을 낳아주었다. 보아스 그는 자기를 비우고 도리어 낮아짐으로 천국의 밭을 일군 사람이었다. 보아스는 참으로 (감추인) 보화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그를 맞아드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당당한 위치에서 도리어 낮은 자리에 처하기를 기뻐했다.

 

보아스는 룻(=우리들)에게 유일한 구주와 같다. 이 복음을 보라!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2:8) - 다른 곳에 구원의 은혜가 없다!

목이 마르거든 마시라”(2:9) -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

주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라”(2:12,3:1)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빈손으로 가지 말라”(3:17) - 은혜의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의 선택을 보라!

 

4:18-22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은 다 쓰러진 나오미의 가정을 구원의 기쁨으로 회복케 한 믿음의 여인으로서, 증손자 다윗왕을 낳은 어미가 되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된 것이다.

 

마태복음 첫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한 절에 주목할 만한 두 여인이 함께 등장한다.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보아스의 아버지는 유대지파의 유력자 살몬이었지만, 보아스의 어머니라합이었다. 라합은 여리고성에 있는 가나안 기생이었다. 그리고 보아스는 이방에서 빈손으로 온 모압여인 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 두 여인 라합과 룻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믿음)의 부요함이 있었다. 하나님은 믿음을 받을 수 있는 자를 알고 계셨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담으셨다.

 

더욱이 앞서서 하나님이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에게서 낳은 쌍둥이 중에서 베레스를 선택하신 일도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죄악중에 출생을 받으시는 속죄의 은총 안에 있다.

38: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38: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38: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8: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을 벗어난 인간의 선택이 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의 다른 점을 보라.

오르바는 (자기)중심의 생존을 위한 삶의 방향을 선택했다. 이에 자기가 살던 모압에 남았다.

이에 반하여 룻은 (타자)중심의 존재를 위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공동체에 머무는 삶을 선택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가!

이 두 사람의 선택방식이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다. 나는 누구인가?


기도 / 암울한 현실의 고통에서도 믿음의 줄을 놓지 않게 하시며,

어떤 국면에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깨닫고 대속의 주님을 향하여 굳게 서게 하소서. 아멘


.........................  금요기도회 말씀  ............................


섬김의 복과 은혜 / 9:33-37

                                                                2023-5-12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대접받고 대우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더욱 유명해지기를 원합니다. 보다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못하게 무시당하는 같으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평화가 깨지고 맙니다.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과연 큰 자는 누구입니까?

지난주 어린이주일을 지내고,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삼 년 동안을 동거하며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관심거리가 대두되었습니다. 앞서서 예수께서는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3년쯤 함께 생활하다 보니까, 누가 더 주님께 가까이 지내고 있는가? 누가 더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가? 누가 더 공력을 쌓았는가? 등등에 대한 초미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에 갈릴리 북서쪽 가버나움 지방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제자들 간에 서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제자 중에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이었습니다.

34절의 서로 누가 크냐라는 말은 분명히 원어에서 비교급으로 되어 있는 말로서, 누가 크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길에서 논쟁한 것을 이미 아시고, 12제자를 빠짐없이 다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은 세상이 가는 길과 다른 역설의 진리임을 보이셨습니다.

 

1) 종이 되어야 으뜸이 될 수 있다.

 

35절의 말씀입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첫째의 비밀이 끝째에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더욱이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안아주시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마치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려면,

사람들 보다 앞에 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두어야 하고 부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반대입니다.

머리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종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완전히 자유로우며 모든 것의 주인이며, 그 어느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리스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책임지는 모든 것의 종이며 모든 것에 예속된다.”

 

또한 하나님 나라라는 저서를 발표한 존 브라이트는 하나님 나라의 분위기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종의 나라로 초청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의 나라이며, 그 나라의 지도자는 기꺼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는 자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자이다.

그렇습니다. 종이 됨으로 으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종이 되어야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갈라디아서 5:13입니다.

 

종이 주인과 다른 것은 주인은 자기 생각대로 하지만, 종은 자기 생각을 우선 비워야 합니다. 내 생각과 주관이 비어질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섬김으로 되어지고, 사랑이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리어 뭇사람의 끝에 설 때 참 자유함이 있습니다.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 섬김의 종이 되어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찌 예수께서 그렇게도 만백성의 섬김을 받으십니까? 예수께서 초능력을 많이 행하셔서 그렇습니까? 말씀을 잘하셔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예수께서 겸손히 낮아지시고 섬기신 분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뭇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기에, 예수님은 영원히 섬김을 받으시게 되셨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다른 이를 위하여 섬기며 봉사할 때 솟아나는 기쁨은 우리가 대접을 받을 때의 기쁨과 비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도시에 갔더니 나를 식탁으로 초대하여 귀한 식사를 대접하였다. 또 다른 도시에 갔더니 나를 부엌으로 초대를 하였다. 나는 거기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기쁨의 정도는 나중에 간 도시에서 크게 맛보았다.”

곧 그와 한 가족이 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는 나라에 초청하셨습니다. 함께 나누며 일하는 그 즐거움을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섬김으로 하는 봉사는 단순히 신앙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봉사는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는 현장입니다.

 

4)섬김이 있는 곳에서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아이라도 예수님과 같이 섬길 수 있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은 자를 향한 진실한 봉사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 봉사가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 선교가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당시 크리스토퍼 로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나루터에서 여자나 아이들을 업어 강을 건네주곤 하였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어느 날 밤 한 소년이 문을 두드리며 어머니가 위독하니 강을 건널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강물은 늘고 물살은 거세어 너무 위험하여서 몇 번이나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처지가 측은하여 결심하고 아이를 업고 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등에 업힌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거의 건너게 되었을 때, 등에서 어른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고맙다 나는 골고다에서 온 세계를 업은 일이 있었다

깜짝 놀라 업고 온 소년을 건너편에 내려놓으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였습니다. 그후 동네 사람들은 이 남자를 성 크리스토퍼 로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은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논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직 뭇사람의 끝의 자리를 찾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뭇사람의 끝에 서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그 정신 가운데 비로소 주안에 있는 자신을, 주께서 세우시는 자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입니다.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여기에는;

시간을 내는 봉사가 있습니다.

물질을 내는 봉사가 있습니다.

재능을 내는 봉사가 있습니다.

바로 나를 내어주는 봉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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