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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봉희목사
설교일 2025-2-5수
본문말씀 누가복음 10:25-37

[1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누가복음 10:25-37 

 

지난주 기도 / 주여! 세상의 비교의식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가 있음이 무엇인지를 믿음으로 찾아내게 하시고, 주께서 주신 청지기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소서. 아멘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영생에 대하여 물었다. 주님은 비유를 들어 분명한 답을 제시하셨다.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먼저, 이 율법사는 오히려 (자기)를 잃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율법사는 남에게 주목받을 만한 지성인이요, 법률가요, 부유한 사람이었다. 이른바 가진 사람 중에서도 우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많은 것을 잃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을 일부러 만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라는 높은 문턱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없었다.

10: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가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고 있다. 자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자기의 존재성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이웃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장담했던 행함도 잃은 자가 되었다. 이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를 보지 못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강도에게 맞아서 거의 죽어가는 것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다.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인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 이튿날 그 사마리아 사람이 다시 주막에 찾아와서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주었다. 이틀 품삯이 되는 돈이다.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 갚겠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먼저 한 제사장을 보라.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이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다. 제사를 시중들기 전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이러한 제사장으로서 이 사람을 만지며 돕다가 피를 묻히면, 만일 만지는 중에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지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24반차의 순번을 따라서 오랜만에 제사를 드릴 일정이 다가왔는데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고 피나 시체를 만지게 되는 날에는 모처럼의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할 중요한 일인 제사드리는 일을 망치면서까지 이 거의 죽은 시체와 같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잃고 만다.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다음으로 레위 사람을 보라.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레위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일만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성전에 관계된 모든 잡일까지도 맡아 하는 성전을 섬기며 봉사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전일 외 구제하고 희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할 일이니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장 쪽에서는 지금 내가 이러한 사람을 도울 ()가 아니다는 입장이고, 레위 사람은 이것은 내가 할 ()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저들은 종교적 이유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오늘 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저버리고 말았다. (오늘)과 그 ()을 잃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다.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는 강도 만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불쌍히 여긴다는 헬라어 어원을 보면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는, 애타는 마음이라는 뜻이 있다. 곧 그 사람의 아픔이 나에게 전달이 된 것이다. 이러한 (공감)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 사람의 마음과 정성으로 보아 계속 거기 머무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도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바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할 일을 다 하고 자기가 다하지 못한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계속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소결론에 이르렀다.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예배자의 길이라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실천하는 길이다.

 

사랑이 행함으로 완성되듯이, 자비는 생각이 아니라, 행함이다.

 

그 자비의 행동 지침의 기준이 무엇인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19:18, 22:39, 10:27, 5:14)

 

사랑의 최고의 경지는 내가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물음을 갖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율법사에게 주님은 해답을 주셨다.

이웃을 찾으면 영생을 찾게 되고 이웃을 잃어버리면 영생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더욱이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강조점이 있다.


강도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 사람은 결국 누구냐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말씀의 의도이며, 복음이다.

(예수)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예수)가 죽음에서 건져주는 너희의 이웃이다.”

 

예수님 자신이 비난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으로 동일시되면서, 또한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주인공임을 친히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이웃으로 영접할 때,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율법사에게 깨우치고 있다. 곧 죽음에서 영생으로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잃고 있었던 나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사해는 갈릴리 호수보다 몇 배나 더 큰 호수이지만, 이웃으로 나가지 못하는 호수이기에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생명이 없는 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작더라도 끊임없이 물을 내어 주는 갈릴리 호수는 물고기들이 뛰어노는 살아있는 호수가 되었다.

 

기 도 / 주께서 나의 선하신 이웃이 되어 주심과 같이, 나도 그들의 이웃이 되게 하소서. !




///// 금요기도회 말씀 /////


하나님의 시간으로 삽니다 / 5:15-21

                                                                      2025-2-7

 

산다는 것은 제 자리에서 제구실을 다 하는 것입니다.

자리는 위치를 말하고, 구실은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에 자리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자리가 없으면 살 수도 없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고, 눌 자리가 없고, 설 자리가 없으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는 하늘을 날 때가 행복하고, 사슴은 숲속에서 뛸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화가는 그림에 열중할 때 생의 기쁨을 느끼고, 시인은 시를 쓸 때, 발명가는 발명에 열중할 때 생의 보람을 느낍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서 주신 자리를 알고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 자리를 잃은 아담을 부르시며 안타깝게 물으신 바 있습니다.

3:9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어떤 시간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곧 내가 어떤 시간 안에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1.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삽니다.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우리가 시간을 아낀다고 아낄 수 있는 것일까요? 또한 그 아낀 시간이 유익한 시간이 될까요?

우리가 구원받았듯이 시간도 구원받은 자에 의해서 무의미한 시간에서 생명의 시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헬라어의 시간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흐르는 일상적인 시간, 가만히 있어도 똑딱똑딱 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런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에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시간으로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세월이라는 말은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아끼라는 헬라어는 엑사고라조’(ἐξαγοράζω)입니다.

이는 속량하다. 구속하다는 뜻입니다.

세월을 아끼라이는 사망으로 떠내려가는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하나님의 시간으로 건져내어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은 A라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한 B라는 사람이 똑같은 하루 24시간을 살아도 이 두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의 개념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 거듭난 자,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다른 시간 속에 살게 됩니다.

시간까지도 거듭난 시간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거듭난 시간 속에 살면서 영생을 얻은 자로 삽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24시도 넘어서 25시에 살고 있습니다.

12장에 등장한 어리석은 부자는 여러 해 동안에 쓸 물건을 가득 재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이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는 재정에 대한 계획을 세울 줄 알면서,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시간을 구속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삽니다.

 

그뿐만 아니라,


2.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입니다.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피와 땀을 쏟으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6:42)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심대로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뜻,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드러났습니다.

 

누구에게 영원함이 있습니까?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3.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뜻 안에 살도록 도우십니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무디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는가? 세상이 당신을 다스리려고 하는가?”

우리는 세상에 빠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 몇 절에서 보듯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

 

1)<>이 바뀝니다. 찬송하는 입술로!

 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영국시인 에드워드 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찬양은 기도보다 더 거룩하다. 기도는 하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나, 찬양은 이미 그곳에 먼저 가 있다.”

  

2)범사에 <태도>가 바뀝니다. 감사하는 생활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3)<사람과의 관계>가 바뀝니다. 그리스도께 하듯!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으로 충만하면 다른 사람을 종된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은 누가 높으냐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건져내면 ;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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