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진리를 만날 때 / 요한복음14:6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진 고귀한 존재입니다.
8월 생명이라는 핵심 단어에 붙여주시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생명이 믿음을 만날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들어가고, 믿음이 들어감으로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 되어질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 하였습니다.
특히 아브람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붙여진 ‘히브리인’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서,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믿음을 만날 때, 건너오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른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타적인 하나님 나라로 건너온 사람이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건너오는 유일한 다리가 되어주신 분이 바로 십자가로 세상 죄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이 진리를 만날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생명’이라는 말은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대표적인 어의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우리말로 표현할 때는 ‘목숨’이라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같은 생명이라 하여도, 맑은 물을 먹고 사는 사람과 오염된 물을 먹고 사는 사람은 그 생명의 힘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진리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진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은 영어에서는 ‘Truth’통용되고 있는 말인데, 진리가 참된 이치의 근본이라면, 진실은 진리를 따라 살 때 드러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양심이 자기에게 묻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죄의 속성에는 적어도 두 가지 뚜렷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이 자기가 주인이 되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난 주일 생명이 믿음을 만나야 한다는 말씀에서 담았습니다.
또 하나는 거짓의 왕 사탄 곧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고 거짓된 세상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 말씀 생명은 다시 진리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은 그 누구라도 제외 없이 가짜 천지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세상, 거짓말의 세상, 거짓 증언의 세상, 거짓 상표와 거짓 증명서의 세상, 속임수와 사기 날조의 세상, 사이비 종교의 세상, 위선자의 세상, 내로남불의 세상, 이 모든 것은 죄성을 지닌 인간의 탐심 곧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이 내놓은 진단서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다고요?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고요? 그런가요? 이거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 상사 앞에서의 거짓된 미소. 주먹이 나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이는 사원. 자신마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꾸며낸 자기소개서, 없는 말마저 지어내야 하는 면접... 그런 거 말입니다.
그래요. 자기감정마저 속이며 껍데기뿐인 삶을 살기 쉽습니다.
혹자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내가 입에 음식을 쳐넣기 위해서라면 거짓된 웃음을 연기하며 웃음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상 사회인이란 창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위선’이라는 말이 빠질 수 없습니다.
위선(僞善,hypocrisy)은 문자 그대로 ‘거짓된 선’입니다. “겉으로만 착한 척한다”는 뜻으로, 반대로 말하면 속은 착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위선의 정의는 선으로 위장한다는 것으로, 즉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외식하는 자에게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매우 싫어하셨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25절입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리고 산상수훈에 담긴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제자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두고 교회를 돌보게 했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서신 디도서1:1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딛 1: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그레데인이 받은 이 같은 평가는 곧 이 세상을 향한 평가인 것입니다.
항상 거짓말쟁이, 남을 잡아먹는 악한 짐승하는 존재, 자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
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거짓이 달콤한 것이라면, 진실은 쓰디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을 따르는 세상은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진실한 삶은 좁은 길입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넓은 길에는 거짓과 허영과 패망이 기다리고 있지만,
진리를 따르는 좁은 길에는 진실과 영광과 안식이 기다립니다.
지금 올림픽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100년 전 파리올림픽으로 가보겠습니다.
육상의 영웅 ‘에릭 리델(1902~1945)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 수상을 한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이던 리델은 ‘주일에 뛰지 않는 남자’로도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아버지 덕에 톈진에서 태어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영국 국가대표였던 리델은 100m의 유력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주일에 경기가 열리는 걸 안 뒤 출전을 거부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법을 따를 뿐”이라는 말을 남긴 뒤 신앙적 소신을 지켰지만, 그를 향한 비난은 날카로웠습니다. 영국 언론은 일제히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거나 “조국을 버린 위선자”라면서 그를 여론의 심판대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월요일에 열리는 400m 출전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리델의 주력종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신뢰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경기 직전 팀의 물리치료사가 리델에게 쪽지를 건넸습니다. 거기에는 사무엘상 2장 30절의 한 부분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2:30)
성경 말씀에서 힘을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경기에서 리델은 47.6초 만에 400m를 주파했고 시상대 맨 위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200m에서도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올림픽 영웅에서 끝났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리델은 육상 경기의 여러 기록을 뒤로하고 고향인 중국 톈진으로 돌아갔습니다. 스코틀랜드 런던선교회 파송을 받은 선교사 자격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따랐던 리델은 중국인과 함께 12년 동안 어울려 살았고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복음 안에 살던 그에게 고난이 덮친 건 일제의 침략이었습니다. 중국 주요 도시를 점령한 일제는 연합국 출신이던 리델까지 수용소로 끌고 갔습니다. 리델이 갇힌 곳은 웨이신 수용소로 이곳에서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 43세에 이곳에서 뇌암으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일제 패망을 불과 6개월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를 파송한 런던선교회(1795년 창립)는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 중국 최초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1782~1834), 바누아트 식인종에게 희생당한 존 윌리엄스(1796~1839) 등과 함께 리델 선교사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습니다.
에릭 리델의 감동적인 신앙과 기적적인 금메달 획득, 무엇보다도 선교사로서의 그의 숭고한 삶은 생명이 진리를 만났을 때 드러난 열매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 진리로 인하여 멈출 때와 달릴 때를 알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실로 100년 만에 다시 파리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 우리는 에릭 리델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리다!
오늘 본문 요14:6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거짓된 세상에서 가짜 인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의 곤고함을 아시고, 진리가 되시고 진실한 삶의 본이 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생명이 진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왕 사탄에게 속아서 살다가 자신도 속고,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하고, 남 앞에서도 위선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등을 돌리고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을 그 멸망의 길에 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믿음의 초청장을 주셨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하셨습니다.
진리 되신 주 예수님과 함께함으로, 주님의 진리 안에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인생을 붙잡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붙잡고 감으로 염려와 역경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좁은 길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세상으로부터 깨어 일어난 생명의 부요함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의 길은 한 방향입니다. 바로 참 생명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허구한 생명으로 잠깐을 살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로서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으로 사는 자의 모습을 증거하며 살다가, 다시는 거짓도 없고,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전쟁도 없고, 염려도 없고, 사망도 없는, 온전하고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며 참 쉼과 참 자유를 누리며 사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진리 되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진리와 함께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에 있음을 감사드리면서, 거듭 오늘에 주신 말씀을 담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진리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달콤한 것이라면, 진실은 쓰디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을 따르는 세상은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진실한 삶은 좁은 길입니다.
100년 전 파리올림픽, 400미터 금메달 수상자요 중국 선교사
‘에릭 리델’을 기억에 담고 싶습니다.
그의 생명은 진리를 위해 달릴 때와 멈출 때를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리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의 길은 한 방향입니다.
바로 참 생명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