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청함을 받은 자 / 누가복음14:15-24
눅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눅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눅 14: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눅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눅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4: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눅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는 왜 큰 발톱이 세 개가 있어?”
“아가야, 그건 우리가 사막을 걸을 때 모래 속으로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있단다.”
아기 낙타가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 그럼 내 긴 눈썹은 왜 있어?”
“아가야, 긴 속눈썹은 우리가 사막을 여행할 때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준단다.”
아기 낙타가 또 물었습니다.
“엄마, 그럼 내 등에 큰 혹은 왜 있는 거야?”
“아가야, 우리가 사막을 오래 여행할 때 섭취할 양분을 그곳에 저장해 놓는단다.”
아기 낙타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아하! 모래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큰 발톱이 있고, 사막의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해 긴 눈썹이 있고, 오랜 여행에 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큰 혹이 있고..... 그런데 엄마!”
“왜 아가야?”
“그런데 우린 왜 동물원 안에 있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습니까?
있어야 할 자리에 살지 못하고, 울타리라는 장애를 겪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인 주일로 지키면서, 장애를 겪고 있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장애의 뜻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장애(障礙)란?
①어떤 사물의 진행을 가로막아 거치적거리게 하거나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함. 또는 그런 일.
②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③정보·통신 유선 통신이나 무선 통신에서 유효 신호의 전송을 방해하는 잡음이나 혼신 따위의 물리적 현상.
그리고, 공황장애(恐慌障礙)는 뚜렷한 근거나 이유 없이 갑자기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공황 발작이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병으로, 공황 발작이 일어나면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의 증상을 보이며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체 장애인 수는 2020년 기준 262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00명 중에 5명이 크고 작은 장애를 겪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100명의 장애자 중에 ‘지체장애’가 46명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청각장애’가 15명, ‘시각장애’ 10명, ‘뇌병변장애’ 10명 등의 순이었습니다. ‘지체장애’가 많다는 것은 선천적 원인보다는 후천적 질환이나 사고로 인해 장애를 얻게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실제로 ‘장애원인’의 80%가 후천적 질환이나 사고로 인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목회데이타연구소). 이는 누구에게나 예측할 수 없이 장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자리로 들어가서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복된 자리가 있습니다.
눅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눅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눅 14: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어떤 임금으로 표현되었고, 큰 잔치는 혼인 잔치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주님의 신부와 같고, 모든 것이 준비된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복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러한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눅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재력을 갖고 사업장을 확장하고 일터로 나가는 자, 내가 새로 구비한 장비를 테스트 해야 하겠다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건강하고 힘이 있는 자, 이들은 모든 것이 준비된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의 초대장을 거부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이들이 오히려 주님께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닙니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것이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목을 막은 큰 장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 복 있는 자로 초청을 받은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21절입니다.
눅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이는 주께서 함께하시려고 받으시는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입니다.
주께서 일일이 초대받아야 할 자들을 적어 넣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시각장애인들, 저는 자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 Newbegin)은 “장애인이 없는 교회는 장애교회다”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교회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지극히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꺼이 영접한 그들 안에 주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천재로 불리던 한 영국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주로 나약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며 크리스천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었습니다.
처음에는 더욱더 하나님을 원망했으나 그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에 젖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연구해 ‘점자 타이프’를 고안해냈고 점자성경도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윌리엄 문(William Moon)입니다.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신앙의 눈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장애 없이 믿지 않는 삶보다 장애를 안은 신앙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
그의 두 눈을 잃은 장애가 도리어 그가 알지 못했던 신앙의 장애를 깨뜨리고 새로운 영적 눈을 뜬 위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 장애가 축복이 된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시성(詩聖)이라 불리우는 호머도, 실낙원을 쓴 밀턴도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스티븐슨은 청력을 잃은 후 ‘보물섬’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악성(樂聖)이라 불리우는 베토벤은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천하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곱사등이었습니다.
바다의 왕자 넬슨 제독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도, 문호 세익스피어도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프랭크린 루스벨트(1882-1945)는 휄체어에 앉아 미국과 세계를 다스렸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30세에 축음기를 만들었는데 그는 아이 때부터 거의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애를 즐겼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소음을 듣지 못해서 더욱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절반이나 쓴 사도 바울은 고질병에 시달렸는데 학자들은 그가 간질병 환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의 사도가 된 후 “내가 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지”를 간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포드 자동차의 창설자 헨리 포드(1863-1947)는 매우 의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장애물이란 당신이 목표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당신이 목표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가장 두려운 장애물은 장애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목표를 상실할 때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친구들의 목표는, 문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 이른바 그 장애물 너머에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그 자체가 장애를 겪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죄와 죽음에 이르는 절망 가운데 있는 장애 그 자체였던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그 아픔을 지시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졌을 때, 그 넘어짐을 지시기 위해서, 우리가 병들어 소망을 잃었을 때, 우리의 질고를 지시려고, 우리가 죽음에 처했을 때, 그 죽음을 지시기 위해서, 주님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며 수없이 넘어지며, 가장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장애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잔치는 바로 저와 여러분~ 더욱이 장애를 안고 있는 성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앞서 청함을 받은 이들은 하나 같이 주님의 잔치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 주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눅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미국 어느 교회에서 천국잔치가 열렸습니다. 좀 일찍 교회에 도착한 부흥 목사가 교회 현관에 들어서다가, 다리가 마비된 여인이 현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인, 여기서 누굴 기다리십니까?”
“예, 저는 일어나지 못하는 자인데, 오늘 이 교회에 신유 은사가 있으신 목사님께서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부축하는 사람도, 휠체어도, 지팡이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 아들 녀석이 태워줬습니다. 제가 내린 후 돌려보냈습니다.”
“예~? 그럼, 어떻게 가시려구요?”
“염려 마세요. 갈 때는 걸어서 갈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오실 부흥 목사님을 통해 분명히 치료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는 그 여인의 말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부인, 제가 그 목사입니다. 자, 손을 이리 주십시오.”
그리고는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 여인은 그날 걸어서 집에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장애 중에 장애는 하나님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장애는 삶의 존재 본체인 영혼의 장애입니다.
이에 더하여 경계해야 할 장애가 있습니다.
바로, 성공을 이루었다고 하는 자에게 다가오는 장애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안겨준 성공과 승리가 더욱 안타까운 장애를 만나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주의할 암초가 있습니다.
곧,
내가 이루었다고 하는 자만입니다.
내가 주인 되는 죄의 함정입니다.
만족에 이르지 못하는 세속적인 성공에 이끌리는 탐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물 중에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바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이라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주 예수께서 택하신 길이 있습니다.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이, 육신에 갇힌 인간이 되셨고,
의로우신 본체이신 하나님이, 죄인이 되셨고,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이보다 클 수 없는 장애”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끌려가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를 벗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막2:5,눅5:20)
그리고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들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갔습니다.
평화의 가족 여러분!
우리에게는 “오늘의 일어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의 일어남”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육간의 완전한 부활입니다.
자칭 “자기는 부족함이 없다” 하는 주님의 초청을 거부한 장애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이다” 말하는 주께로부터 초청받은 복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복이 있는 자입니까?♬
<축도후 영상>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이, 육신에 갇힌 인간이 되시고,
의로우신 본체이신 하나님이, 죄인이 되시고,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이보다 클 수 없는 장애”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끌려가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를 벗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의 일어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의 일어남”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육간의 완전한 부활입니다.
주님의 청함을 받은 자 / 누가복음14: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