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사람의 소망! / 베드로전서1:18-21
영국속담에 “아침에는 이상주의자로 조반을 먹고, 점심에는 유물론자가 되었다가, 저녁의 식탁에서는 비관론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어렸을 때는 예쁜 동화책을 펴놓고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자랐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물질주의라는 배 중에 하나를 골라 타고는 바다에 띄우고 비바람과 싸우며 먼바다를 항해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오면 행복한 삶을 수 있겠지... 속삭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저녁노을이 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 나이가 되니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가 그것이 행복이었던가 하면서 헛되고 헛되게 지나간 세월에 일생을 바친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희망을 말하지만, 그 희망의 무력함을 인생과 인간이 남겨놓은 역사책이 말해줍니다.
‘희망’과 ‘소망’ 둘 다 영어로는 ‘hope’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희망’은 내가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곧 소망은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것입니다. 희망의 주최자는 나 자신이지만, 소망의 주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희망은 대체가 가능하지만, 소망은 다른 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생의 목적을 찾아가는 것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소망은 희망보다 더욱 분명한 것입니다.
희망은 평생 끊임없는 흔들림을 경험하지만,
소망은 오히려 흔들리는 평생을 붙잡아줍니다.
희망은 누구에게나 머물다 갈 수 있지만,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망은 주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 곧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거듭나야 희망에서 소망으로 갈아탑니다.
성경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인생의 자리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렇습니다.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세상은 그 세상에 배를 띄운 사람들에게 확고한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이라는 말과 구원이라는 말을 함께 붙여서 전하고 있습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말씀을 쉬운 성경으로 담아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망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소망을 구주 예수께서 오심으로 우리 구원을 입는 자에게 내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에서는 거듭난 자가 받은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3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받은 꺼질 수 없는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주신 소망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보상한 이 소망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망과 같은 고통에서도 깨뜨려질 수 없는 소망입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을 치룬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 소망의 값은 그 어떤 것으로도 계산될 수 없습니다.
이 소망은 재물로 대신할 수도 없고, 재물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소망은 <거듭난 사람의 소망>입니다.
벧전 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어떠한 자세로 삽니까?
거듭난 사람은 내 생명의 소유권이 내게 있지 않음을 알고 삽니다.
이는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내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을 구합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생하는 자로서 하늘에 소망의 결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날을 바라보며 삽니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히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런 사람에게 있는 소망을 그 어떠한 죽음까지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소망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소망을 막을 수 없습니다.
잠 14: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영국의 크리스챤 문필가 C.S.루이스가 세상에서 보고 깨달을 점을 전해줍니다.
“현세를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이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
더욱 놀랍고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현세를, 아니 오늘을 그렇게 무책임, 무감각, 무의미하게 살지는 않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쓰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그리고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간디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소망을 잃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곧 소망의 나라를 전하는 소망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유토피아’에서, ‘토피아’라는 말은 ‘장소’라는 뜻의 헬라어 ‘토포스’(topos)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유(u)’는 ‘없다’는 말입니다. 곧 “No Place”, 곧, 이 세상에 없는 곳!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이 꿈꾸는 나라는 세상에는 없는, 그러나 머물고 싶고, 누리고 싶은 희망 사항으로,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토피아가 No Place, 세상에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면,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은 “IN JESUS”, 곧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인 것입니다.
소망의 증인된 성도 여러분!
대홍수 심판 후에 소망의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노아의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가 있습니다.
바로 거듭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너희가 세상의 소망이다!
죽은 희망을 산 소망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물질지상주의와 이기주의로 물든 이 세상의 무의미와 절망, 파괴되는 자연, 그리고 죄악의 흉악한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거듭난 사람에게 주신 소망을 가지고, 어떠한 절망이 엄습하는 환경 가운데서도 거듭난 생명을 더욱 값지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존 하가이(John E. Haggai/1924~)라는 미국의 전도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는 외아들 존(Johnny)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태어날 때(1950), 술에 만취한 분만 의사의 잘못으로 이 아이가 뇌손상을 입게 되었고 정신박약아로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설교를 하면, 아들 존은 휠체어에 앉아서, 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은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를 고쳐 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이 아이를 안고 다니면서 24년을 지내다가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들이 죽은 후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가이 인스티튜트’(Haggai Institute)라는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제3세계 선교를 연구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사람들을 보내는 훌륭한 기관입니다.
존 하가이는 지난 53년 동안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및 중동 등 189개국에서 130,000명 이상의 지도자를 양성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가이 목사는, 외아들이 만취한 의사의 실수로 정신장애자로 태어나 24년을 살다가 부모의 곁을 먼저 떠나게 된 그 고통과 연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준비한 부활의 산 소망으로 더욱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외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일어나 어렵고 힘든 온 세상의 가난하고 절망에 놓인 자들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좌절할 수 없는 소망, 거듭난 사람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으시면서, 부활의 역사와 함께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거듭난 사람은 실망, 절망에게 구석 방이라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시편 말씀을 함께 자신의 영혼에 담겠습니다.
시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시는 여러분! 함께 고백합니다.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이제 여기 모든 사람이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갖고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딤전 4: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
<축도후 영상>
‘희망’은 내가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소망은 "거듭난 사람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보상한 이 소망은
그 어떠한 고통과 죽음까지도 막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