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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21.11.20 17:44

평생을 사랑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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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봉희목사
설교일 2021-11-21낮
본문말씀 누가복음 22:59-62


평생을 사랑하시는 주님 / 누가복음 22:59-62 

 

22: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22: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어떤 사람이 한 번은 농아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칠판에다 이러한 질문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는 듣고 말하도록 만드시고, 여러분은 그렇지 못하게 만드셨을까요?”

이 냉혹한 질문 앞에 그 아이들의 몸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일어나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나아와 분필을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썼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 보시기에 그대로가 좋은 줄로 아나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날 금요일 새벽이 밝아올 무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야바(26:57)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뜰에 피워놓은 불 가에 앉아 있다가 대제사장의 여종으로부터,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 또 한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처럼 닭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닭은 울어댔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닭 우는 소리는 자신이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자기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각오를 깨우치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있어서 닭 우는 소리는 이제 너의 그 죄와 허물마저도 내가 다 지고 간다는 사랑하는 주님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죽음과 확실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들 살 만큼 살다가 갔습니다. 모하메드는 62세에 자연사했고, 공자는 72세에 자연사했고, 부처는 80세에 자연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대 초반에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고, 세상죄를 지고 사람들에게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속자와 구도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것이 희생자와 철학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나는 너의 평생을 사랑하는 주님이다!

 

나의 인생이 잘되고 있을 때나, 잘못하고 있을 때나, 존경을 받고 있을 때나, 욕을 먹고 있을 때나, 주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나, 주님의 이름을 망가뜨렸을 때나.... 그 전부를 통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마지막 절인 6절에서 이렇게 찬송합니다.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내 평생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다윗도 사울왕의 암살음모에 시달리며 죽음 앞에 선 날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생애중에 한 번도 난 너를 모른다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다윗은 시편 139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인용해봅니다.

 

139: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139: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9: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39: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그리고,

144:3[다윗의시]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여러분!

나의 일생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이 고백은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나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시작이며, 우리의 현재이며, 우리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이미 받아놓으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과 내일 일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야 할지를 아십니다. 이는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걸어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매일 아침 다시 눈을 뜰 때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깰 때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넘치는 고난을 받고 있던 욥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7: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부분이 아닌 전부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의 전부를 감당하신 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전부 안에는 오점도 있고,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도 있고, 실패하고 실망한 그날도 있고, 인생에는 젊은 날의 아름다움도, 늙은 날의 늘어진 주름도 있고, 건강한 날도, 병들어 누운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부를 사랑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때도 주님은 그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눅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주님은 큰 오점을 남겼던 베드로를,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제자로 쓰셨습니다. 그의 평생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에 그 후에 베드로가 말씀을 전파할 때,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회개하였습니다. 사울 청년도 핍박자로 있던 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평생을 이미 받아두고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 앞에 있는 주님은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주님의 사랑은 동일하십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도 동일한 사랑이셨습니다.


양탄자 밑에는 항상 흙먼지가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엎드려 그 양탄자를 거두어 보세요.

내 입술에서 나간 부끄러운 말들, 거짓말들, 아담과 이브처럼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 말들,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그 결과가 좋지 않자 하나님을 원망한 말들....바로 그 먼지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함없으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모든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영어에서 ‘can’할 수 있다는 의미의 조동사이지만, 명사로 쓰면 깡통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빈 깡통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천상의 보좌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주께서 빈 깡통 같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빈 깡통에 들어가면 안 되겠니?”

너의 소망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들어보지 않겠니?”

 

김구 선생께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입니다.

일본인 헌병이 한국인 청년을 매수해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붙잡혔고, 사람들은 청년을 처형하기 직전에 김구 선생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을 암살하려던 청년을 붙잡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이 청년을 용서해 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을 붙들고서 내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니 실로 감격스럽다.”라고 하면서, 그 청년을 부둥켜안고 기뻐하자, 이 청년은 그 마음이 변하여 독립군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며 헌신하였다고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파 소설가 조지 샌드(George Sand)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단 <한 페이지의 인생>도 찢어낼 수 없지만,

<인생이란 책 한 권>을 통째로 불 속에 집어 던질 수는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한 페이지도 찢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나의 평생을 통째로 받아주시려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전부 내놓으셨습니다.

 

삶이 때로는 고난과 슬픔 가운데 놓이곤 합니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계십니까?

그러면 이 명언이 적잖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고난은 낭비되지 않습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의 말입니다.

(No faithful suffering is wasted. - John Piper)

 

우리는 이 찬송을 부릅니다. 2144절 가사를 음미해봅니다.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법을 기록한 레위기에서 전부라는 단어를 주목하게 됩니다.

1: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는 이미 더러워졌던 우리를 전부 받으시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건질 것이 하나도 없는 빚진 자의 인생을 전부 탕감하셨다는 말씀은 곡절이 많은 나의 평생을 전부 받아주신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평생을 사랑하시고 온전히 받아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야기 하나 들어보세요.

주전 4세기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라는 도시에 명성 높았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방문객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뜬금없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그러자 방문객은 이번엔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답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만, 실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디언의 격언에 깊은 깨달음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주일은 걸어 다녀 보아야 한다.”

성도 여러분!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신발을 신고 33년을 함께 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을 받으시려고 이렇게 가장 귀한 선물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보다는 선물을 보내준 사람의 사랑을 더욱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전부를 우리를 위해 드리심을 헤아리는 영적 감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의 평생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의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나를 그렇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나영자 시인의 염색이라는 시를 담아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냥

주님으로 푹 물이 들면 좋겠습니다

 

물감이 천에 물을 들이듯

주님으로 제가 물이 들면 좋겠습니다

 

가르치는 것과 사는 것 따로 있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따로 있으며

깨달음과 실천이 따로가 아니라

 

주님의 삶이

내 몸에 배어버려서

그냥 사는 것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 줄줄 외우지 못해도

조리있게 진리를 변증하지 못해도

 

그냥 사는 것이

말씀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으로

푹 물이 들어 버리면

참 좋겠습니다.

 

<축도후 영상>

 

하나님은

나의 <부분이 아닌 전부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받으심과 같이!

핍박자로 있었던 사울을 사도로 받으심과 같이!

 

이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의 평생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의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나를 그렇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59-62

평생을 사랑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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